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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ニのパズル』の謎 [Korea]

在日朝鮮人文学との出会い
学生時代に出会った在日2世の友人(父が韓国人で母は日本人)との出会いを通して在日問題や韓国・朝鮮に関心を抱いた私は、20代を通して、金達寿(キム・ダルス)、金石範(キム・ソクポム)、李恢成(イ・フェソン)らに代表される1世・2世の在日朝鮮人文学に深い共鳴を覚えて耽読した。しかし、その後、李良枝(イ・ヤンジ)や柳美里(ユ・ミリ)ら第2世代の在日作家らが登場すると、そこにある種の違和感を覚え、その後、在日文学からは遠ざかることになった。
その後私はニューカマーの韓国人と結婚し、韓国にも3年間住んでみて、私が在日朝鮮人文学を通して知った在日家庭に共通する特徴―父母を敬い、親族のつながりを大切にし、先祖の供養を怠らないといった儒教的風習はもとより、酒飲みで妻や子どもに暴力的な父親像、それに対して「アイゴー、アイゴー」とただ嘆くだけしかなすすべを知らない母親像―といったものは、実は植民地時代の遺物、少なくとも南の韓国ではタイムカプセルの中に閉じ込められた過去の家族像であることを知るに至った。
もっとも、在日家庭も3世、4世の世代になれば多分に日本人化し、そのうえ、この四半世紀のうちにも多くに人々が日本に「帰化」した。
在日韓国・朝鮮人という歴史的に特別な過程をたどって形成された人々も、戦後70年も経てばその様相は大きく変化して当然だ。それは例えば、在米日本人、ブラジル移民3世・4世・5世といった人々、さらにいえば、アメリカのアフリカンや世界中の難民や移民のたどる歴史と共通するものがあるだろう。民族的風習が失われ同化するのも無理はない、言語に至っては、2世以降どんどん失われていくのは防ぎようがない。

朝鮮人学校の特殊性
そうしたなかで、日本の朝鮮人学校が守ってきたものは、戦後史の中でかつて日本の植民地支配によって奪われたものを取り戻し守っていくという1世たちの強い民族意識に支えられてきたとはいえ、今となってはそれは歴史遺産的存在になったといってもいい。
私が長らく疑問に思ってきたのは、例えば制服としてのチマ・チョゴリだ。日本の和服同様70年前までは日常服として珍しいものではなかったチマ・チョゴリも、北朝鮮も含めて、今ではそれは日本同様、特別の日にしか身につけるものではない。また、女子だけがチマ・チョゴリで、なぜ男子生徒はパジ・チョゴリでないのかも不思議だ。現に、韓国系の数少ない民族学校の制服は、日本の私立学校同様、男女ともブレザーのところがほとんどだ。
また、朝鮮語を第1言語とするといいながらも、教師自身が2世・3世なので、その発音ははなはだ怪しいもので、朝鮮学校出身者でも何不自由なく朝鮮語が話せる人はそう多くはないようだし、話せる人も日本訛りがひどい人がほとんどだ。つまり、それは生きた朝鮮語とはいいがたい。
その点、上述した韓国系の学校では英語も含めて言語教育に力を入れていて、本国派遣の教師も多いようなので、生きた言語を身につけることができるようだ。民族教育の観点というよりも、より実用的観点に立脚しているのだろう。
70年代以降、金日成独裁への反発と日韓国交回復を受けて朝鮮籍から韓国籍へ移る人が増加したが、前述したように、今ではさらにそこから日本への「帰化」者が多数派になっている。だからといって、彼らのすべてが自分の出自を捨てて、完全に日本人化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80年代に李良枝が日韓の狭間で在日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に苦悩した時期を通過して、今、多くの在日韓国・朝鮮人あるいは韓国・朝鮮系日本人は、アフリカン系アメリカ人、ヒスパニック系アメリカ人、日系アメリカ人、韓国系アメリカ人といった人々と変わらぬ、韓国系日本人、朝鮮系日本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確立しているのではなか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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ピースがはまらないパズル
『ジニのパズル』という第59回群像新人文学賞受賞作で芥川賞候補作にもなった作品が注目されているというので、これは読まざるを得ないと思い読んでみた。
作者の崔実(チェ・シル)の経歴は1985年生まれの東京在住ということ以外未だ詳らかにされていないので想像に任せる以外にないのだが、作品に書かれている時代背景から考えて、主人公のジニは作者の分身と考えて間違いなかろう。どこまで作者が実際に体験したことなのか、どこからがフィクションなのかは定かでないが、ジニの朝鮮学校での体験を記した部分は、恐らく作者が10年以上暖め続け、何度も書き直して推敲を重ねてきた部分と思われる。金父子の肖像画をめぐる事件の記述は確かに圧巻だ。一方、ジニのアメリカ留学の部分は後から付け足したフィクションなのか、文体も少し違っていて、明らかに異質なパズルのピースという気がする。私も昔は純文学指向で、尊敬する大作家の文体を無理に真似ようとした時期もあったが、名だたる芥川賞受賞者の作品の珠玉のような文体は、詩人の紡ぎ出す言葉にも似て天性のもののようで、私のような者にはとうてい真似できないことを悟って以来、自然体を心がけるようになった。この作品も芥川賞候補になったそうだが、文体のみならず、構成を含む作品の完成度や掘り下げの浅さからいって、そこまで芥川賞の値打ちは下がっていないだろうと思った。
それはさておき、小説のサビの部分では確かに圧倒されはしたものの、この作品にはいくつもの謎が残る。
まず、ジニはなぜ日本の小学校に通いながら、中学校から朝鮮学校に通うことになったのか? 日本人の友だちもたくさんいたのに、たった1人の同級生の心ない言葉だけでは、朝鮮学校への転学を決意させる動機としては弱すぎる。また、小学6年生の少女の気まぐれとするにはあまりに突飛な選択のように思われる。
しかも、いざ自ら選択して入った朝鮮学校なのに、そこで朝鮮語を積極的に学んだり、チャング(太鼓)や民族舞踊などを積極的に習おうというのでもない。「누구?」(ヌグ:誰)という朝鮮語を「脱ぐ」という日本語と勘違いするくだりでは、正直笑う気にもなれなかった。なぜなら、音は確かに同じ「ぬぐ」なのだが、イントネーションが「脱ぐ」を「脱ぐ?」と疑問形にしても「누구?」とは全く異なるので、日韓(朝)両国語に通じている人だったら絶対に勘違いするような言葉ではないからだ。これが実際に作者が体験したことであろうとなかろうと、作者の朝鮮語力は未だにその程度のものなのだろう。
といって、私は作者を非難したり上から目線で見下すつもりはない。先ほども述べたように、3世、4世ともなれば、言語が失われない方がおかしいからだ。私がここでいいたいのは、こうした記述ひとつひとつが、前述した謎を深めるからなのだ。
テポドンが日本上空を飛んで太平洋に落下した翌日、ジニはチマ・チョゴリを着て登校しようとして酷い目に遭う。同様のことが当時実際に各地で起こり、人権問題化した。そう、これは民族問題というより、明確に人権侵害問題だ。80年代の第1次日韓ブームを経て、00年代の韓流ブームへと続く端境期にあって、戦後連綿と続いてきた在日差別の底流が一時的に吹き出した時期であり、その底流が今のヘイトスピーチへもつながっているわけだが、ジニの怒りはそうした日本社会の差別構造へと向かうのではなく、朝鮮学校へ、しかも、上述したような歴史遺産的な諸側面のなかでも最も象徴的な金父子の肖像画へのみ向かうのだ。一方で、私が常々違和感を抱いてきた女子のみのチマ・チョゴリは、唯一の親友のニナの民族舞踊を通して全肯定される。
朝鮮学校への入学とヘイトクライムまがいの被害、そこから金父子肖像画事件へと至る葛藤が、いくら中学1年生の少女だからといって、30歳を超えた作者の視点を通しても、納得いくような脈絡で描かれていない。それはとりもなおさず、そのことが作者自身にとっても、未だに完全に消化され理性的に整理がついていないからに他ならないのだろうか、とも思ってみる。
数年前に、ヤン・ヨンヒ監督の「かぞくのくに」という映画を観た。北へ渡った兄が25年ぶりに監視員を伴って家族の下へ一時帰国する話だ。すごくリアルな話だった。
また、それと前後して「アジアの純真」という映画も観た。こちらは方嶋一貴という日本人監督の作品で、ジニのようにチマ・チョゴリを着ていた朝鮮高校の生徒がヘイトクライムによって殺され、その双子の姉妹がテロリストになって日本社会全体に復讐するという物騒な話だが、ある意味説得力のある作品だった。
ジニは自らを「革命家の卵」と規定するのだが、日本の地における金父子への反乱は、あくまでバーチャルなたたかい、それは極端な話、ゲームソフトの中のたたかいと変わらないかもしれない。ハリウッドでの金正恩の首が飛ぶエンタメ映画が物議を醸したが、それほどまでに現実にコミットすることもない。
ジニは現実には学校側によって処分―退学、そして精神科への入院も学校側の手配によるものかもしれない―は受けたのだが、本国なら間違いなく公開処刑だから、この落差は大きすぎる。
そして、「事件後」の顛末も述べられなければ、ジニのその後の精神的葛藤の変遷も述べられない。
突如としてアメリカへ飛ぶ。そして具体性のない記述の果てに、ある種の「救済」を得る。
パズルを解く唯一の手がかりといえば、断片的に挿入される北朝鮮へ「帰国」して死んだジニの祖父からの幾通かの手紙だが、それこそばらけたピースのままだ。

日韓、日朝を超えて羽ばたく
日本人の父親とニューカマー韓国人の母親の間に生まれた私の娘は、作者とひと世代も歳が離れていないが、作者とは全く異なる人生を歩んできた。彼女も幼少期から自分に韓国人の血が流れることを隠すことなく日本社会で生きながらも、それと意識するような差別を受けることもなく育ち、2年半の韓国生活で韓国語も身に付け、おまけに英語も韓国語以上に堪能になった。日本語で母親と話すときはママだが、韓国語で話すときは自然にオンマとなる。サッカー日韓戦ではいつも熱烈に日本チームを応援するが、竹島問題では日韓共同管理にして仲よく資源を分け合えばいいではないかと小学生の時、新聞に投書した。
私自身も、若い頃は「贖罪派」に近い意識を持っていたが、3年間韓国に暮らし、韓国のおかしいところはおかしいとはっきり言える日韓関係を築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ようになった。そして、娘の成長を通して、今や韓国だ日本だとこだわる時代でないと思うようになった。
もちろん、在特会等のヘイトスピーチは人権問題として絶対許されないと強く思っている。歴史から目を背けてはならないとも思っている。北朝鮮の独裁体制が一刻も早く崩壊して北の住民たちに自由と豊かな生活が訪れることも願っている。
そんな私にとっても、ジニのパズルは謎が多すぎてちっともピースが埋まらない。
そういえば、娘は小さい頃ジグソーパズルが大好きで、ひとりで難なく完成させたトトロの絵は今でも額縁に飾ってある。今度娘に会ったら、ジニのパズルを解いてもらおうか。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인가 의사인가? [Korea]

경건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안중근은 양반집안에서 1879년에 태어나 18살 때 천주교에 입신하여 일생을 경건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초대 조선통감으로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할 무렵부터 한국국내에서 일어난 의병에 참여하고,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유입해 있던 러시아 연해주에 체류하던 중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을 사임하고 연해주를 방문중이라는 사실을 듣고 하얼빈역으로 거사를 치르기 위해 갔다.
러시아군에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정부쪽에 넘겨져 당지에서 재판을 받고, 1개월의 공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음해 3월26일, 사건 후 5개월만에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은 ‘죽인자는 죽음을 당한다’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근거없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의병 중에는 난폭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감화시키고 석방한 적도 있었다. 또,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도리에 맞게 정정당당하게 주장하는 안중근의 태도는, 체포 후에 그를 만난 공판 관계자나 형무관들을 감화시켰다. 특히 젊은 간수, 육군상등병인 지바 주시치(千葉十七)는 그에게 깊이 탄복하고, 안중근이 지바에게 남긴 유묵(遺墨)을 일생동안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넬슨 만델라가 수감중에 간수를 감화시켜 동조자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남아프리카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긴 세월을 옥중에서 보낸 만델라 ANC의장도,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에 저항하여 게릴라 투쟁을 전개한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도, 일부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일본 지폐의 초상화가 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조슈한 출신인 그는 막부를 타도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1862년에는 막부 말기의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을 주장한 나가이 우타 암살을 꾀하고,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있던 영국공사관 전복을 위한 공격에 참여했고, 야마오 요조와 함께 하나와 지로•가토 고지로를 암살하는 등, 천황을 받들어 모시기 위한 존왕양이의 지사로서 활동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테러리즘이라고 한다면, 동포를 몇 명씩이나 죽인 그야 말로 테러리스트라는 명칭이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수상 재임중에 일어난 한국의 왕비 민비 살해에 있어서, 주범이었던 주조선국 특명전권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국의 왕비를 정부 관계자가 살해한 그야말로 국가 테러 그 자체인데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이라는 명분으로 면소판결, 석방되었다. 또한,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하고 한국의 실질적인 식민지화를 추진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초에는 ‘한일합병’에 반대했으나 후에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하며 1909년5월 스스로 사임하고, 다음 해 ‘한일합방’의 길을 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시민사관을 창조하자
이전에 영토문제를 논했을 때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구미 국가들로부터 ‘역사 수정주의’로 불리는 일당들이 되풀이 하고 있는 역사관련 문제들과 전면적으로 대결하여 그들을 타도하려면, 전쟁에 대한 총괄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백 수십년간에 걸친 일본의 역사총괄이 필요하다.
옛부터 언급되어왔듯이 메이지유신은 신흥 부르조아에 의해 거행된 시민혁명이 아니라, 개혁파였던 하급무사가 오랫동안 문자 그대로 ‘상징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던 천황을 권위의 상징으로서 받들기 시작하면서 절대주의 왕조를 표방하여 이룬 개혁으로, 이 정권은 부국강병이라는 명분 하에 국가 주도로 자본주의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다른 아시아국가들이 모두 구미열강의 식민지, 반식민지화 되어 가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의 하나로 일본에게 개국을 강요했던 미국이 남북전쟁(1861∼65)으로 꼼짝달짝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일본에게 있어서 생각지도 못 한 행운이었을까? 차라리 일본도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함께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서 절처하게 박탈당한 후에,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민족해방운동을 거쳐서 독립을 쟁취했다면, 일본도 오늘날 더 나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이 나라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모 나라의 식민지로서 계속해서 존재했을까?)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 자본주의 국가로서 걷기 시작한 일본은,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같은 아시아국가를 지배하여 식민지화하여 제국주의화를 완수한다. 메이지시대에서 쇼와시대 전기는, 그야말로 일본은 전쟁시대였다.
그러므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래 1945년의 패전까지, 절대주의적 천황제를 이데올로기의 기반으로 하여, 철저히 반민주주의적,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적 정치지배를 계속해왔고, 그 과정에서 국가경영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온 것은 강력한 관료제였다.
그런 과정에서 하급무사였던 급진세력은 보다 민주적인 정권을 목표로 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일어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운동도, 바로 한국의 식민지화와 시기를 같이 하여 날조된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의해 탄압되었다. 그 후,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에서 힘을 얻은 국제공산주의 운동 속에서 1921년에 결성된 일본공산당도 보통선거법 대신에 성립된 치안유지법에 의해 탄압, 전시하에서 근절되었다. 이 점이, 같은 추축국 중에서도 나치스 반대운동의 뿌리 깊은 저항에 부딪힌 독일 및 빨치산투쟁으로 무솔리니를 타도하고 왕정에서 공화제로 이행시킨 이탈리아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억 총옥쇄(總玉碎)’체제하에 있었던 일본은, 미국이 투하한 2발의 원자폭탄에 의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연합국=미군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천황제는 유지되었고, 전쟁 전의 정치체제를 옹호해온 반민주주의적,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적인 세력도, 온건보수 여당에 내포되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감옥에서 해방된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민주주의자들은 한 때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정권을 장악한 적은 결국 없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전쟁에 대한 총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직접 전쟁과 관련된 사람들이 공무에 복귀하는 일마저 암묵리에 승인되었으며, 표면상 ‘민주화’된 일본은, 그 지하에는 메이지유신 이래의 관료와 반민주적 보수 정치세력의 지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일하게, 선거를 통해 실현된 민주적인 정부라고 부를 만한 것은 2009∼12년의 민주당 정권이었으나, 그것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처럼 열매없는 꽃으로 끝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계의 냉소를 받고 있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활보하면서 ‘종군위안부는 어느나라에나 있었다’’난징대학살은 없었다’’센카쿠, 다케시마, 북방 4개섬은 일본 고유의 영토다’’도쿄재판은 부당하다’’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 일본의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패거리들의 헛소리를, 메이지유신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안중근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동양평화와 한일우호’를 빌어 마지 않았다. 국경을 초월한 ‘시민사관’을 목표로 하는 우리 국제시민들은 100년전에 안중근이 남긴 유언이야말로 마음의 양식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는 고작해야 혼슈•시코쿠•규슈 정도이다 [Korea]

일본정부나 언론이 센카쿠열도다케시마(독도), ‘북방영토’를 부를 때, 반드시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접두사를 붙인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부러 ‘시마네현 다케시마’라든가 ‘오키나와현 센카쿠열도’ 등과 같이 현을 붙여서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고유의 영토’는, 고작해야 혼슈•시코쿠•규슈의 3개 섬과 그 주변의 작은섬이 전부라는 것은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만 해도 명백히 알 수 있다.
대체로 근대사회에 들어설 때까지는 측량기술도 확실하지 않았고, 세계의 대부분의 경계선 지역은 미개척지로서 국경 같은 것은 없었다. 일본을 보더라도, 홋카이도는 에조치라고 불리는 아이누의 거주지였는데, 최남단의 마쓰마에반도를 마쓰마에 번이 지배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아이누민족의 토지(아이누모시리)였다. 마찬가지로, 오키나와는 일본천황이 아닌 다른 왕권이 지배하는 류큐왕국이었는데, 그 작은 왕국은 지혜를 짜내어 청나라와 일본의 사쓰마 번 양쪽에 속하는 형식으로 독립을 유지해 왔다.
(센카쿠열도나 다케시마(독도)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양국이 다 찢어진 고문서를 찾아내어 ‘이거 봐라, 이렇게 옛날부터 ××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였다’고 서로 주장하는 것 만큼 결론 없는 논란도 없을 거다. 그러기에 ‘영토문제’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만국이 인정하는 일개국의 토지였다면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토문제는, 시라이 사토시(白井聡)가 언급했 듯이, 직근의 전쟁결과가 ‘영토지배의 경계선을 원칙적으로 규정’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몽골은 세계 최고의 대국이 될 것이다. )
메이지유신 후, 류큐왕국은 1871년에 류큐처분에 의해 일본정부에 합병되었고, 원래 수렵과 어업경제 하에서 국가가 없었던 ‘아이누모시리’는 일본 내지에서 들어온 이주민에 의해 토지를 약탈당하고, 생활권을 빼앗겼다. 그것을 ‘합법화’한 법률이 악명높은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1899년)이었다.
메이지정부는 부국강병이라는 명분 하에, 국내에 대해서는 국가주도의 자본주의화, 국외에 대해서는 구미열강의 대열에 끼기 위해 주변지역에 군사적인 침략을 시도했다. 그것이 1894년부터 시작된 청일전쟁이며,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이었다. 바로 이 두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과정에서, 센카쿠열도는 1895년1월, 다케시마(독도)는 1905년1월에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전쟁의 결과,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대만을 얻어 식민지화하고, 한국은 ‘보호국’으로서 통감부를 설치하여 반식민지화, 1910년에 완전히 식민지화하고 총독부를 설치했다.
또, ‘북방영토’에 대해서 말하자면, 에도막부 말기의 러일화친조약(1855년)으로 에토로후와 우루프섬 사이에 국경선이 그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후 지시마 가라후토 교환조약과 포츠머스조약 등 일련의 변천을 거쳐, 결국 1956년의 러일공동선언을 통해 ‘평화조약체결 후 하보마이열도와 시코탄도를 일본에 반환한다’는 합의가, 일본이 두 섬에 대해 유일하게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센카쿠열도, 다케시마(독도), ‘북방영토’ 모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포츠담선언을 수락,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한,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하보마이, 시코탄 두 섬의 반환에 대해서만, 러일평화조약을 전제로 한 현실성이 있겠지만).
한편, 센카쿠열도와 다케시마(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중국이나 대만, 그리고 한국의 영유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명백하다.
처음부터 영토문제라는 것은, 국경 변두리 지역의 작은 토지를 둘러싸고 야기되는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중-소 국경분쟁도 그렇고,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한 포클랜드분쟁도 그렇다. 센카쿠열도나 다케시마(독도)는 원래 무인도. ‘북방 영토’에 일본의 어민이 살았다고 해봤자 겨우 몇십년간. 그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몇백년에 걸쳐 조상대대로 홋카이도에서 살아 온 아이누 사람들이야말로 ‘샤모’(일본민족)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북방영토’인 구나시리, 에토로후의 영유권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면, 반대로 그 이북의 지시마열도에 살았다거나, 사할린에 살았다거나, 또한 식민지시대 때 조선이나 대만, 나아가 ‘만주’에 살았던 일본인하고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게다가 세월이 몇 세대나 흐른 지금, 그들 자손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가?
아니다, 센카쿠열도에는 석유, 천연가스 등 해저자원이 있다고 한다면, 일본-중국-대만이 공동으로 개발하여 이익을 서로 나누는 것이 신사적인 해결방법일 것이다. 기타 지역의 어업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어업권에 대해서는 그렇게 교섭을 하여 그나름대로 타협해왔다.
도대체, 그렇게 작은 섬, Googlemap을 초 대형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을 둘러싸고, 대국이 서로 눈을 부라리며 싸우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야생동물의 세력권 다툼에도 뒤떨어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시대는 21세기. 글로벌화, 보더레스화로 국경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시대다. 나는 각국의 국가주의적인 역사관에 대해, 각국의 국경을 초월한 공통된 ‘시민역사관’을 지금이야말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영토문제’도 그 속에 포함시켜, 시민역사관에 의해 국경을 아예 없애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센카쿠열도에다 다케시마(독도), 그리고 ‘북방영토’를 합한 것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를, 우리 일본국민들은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폭발사고로 방사능오염시켜 실질적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몇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현실을 보기 바란다. 또한, 일본에 40년전에 반환된 오키나와가 지금도 미군이 10% 이상의 토지를 점거하고, 시내를 온통 군용기가 폭음을 내면서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미국병사가 제멋대로 거리를 활보하며, 깡패 같은 병사가 강간 등 범죄행위를 저질러도, 미일지위협정때문에 재판조차 충분히 할 수 없는 반식민지상태에 놓여있는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이쪽이 일본사람 한테는 한층 더 절실하고 긴급을 요하는 문제이다.

2014년을 한-중-대-일 시민연대 행동 원년으로! [Korea]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나 한국의 위정자들은 국내의 모순을 감추기 위해 반일감정을 부채질하여 국민의 관심을 해외로 향하게 했다. 이에 대해 경제 대국 일본은 냉정하게 대처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한 장점이었던 경제가 침체하고, 게다가 3.11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일본정부에 대한 비판이 쇄도하자 일본 위정자들도 일부 국민 사이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편협한 반중-반한 민족주의를 부채질하여, 센카쿠제도(尖閣諸島)-다케시마(竹島-독도)와 같은 영토문제를 내세우고 반중-반한 정책으로 바꾸어 언론을 총동원한 배외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특히 재작년 말에 아베정권 출범 후 작년 여름에 참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이 중참양원의 과반수를 차지한 이후, 그들이 파시즘화 노선 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후, 일한, 특히 일중간에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불온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일본시민들이 국내에서 반전평화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너무도 약세하다. 한-중-일의 권력자들이 서로 적대하는 지금이야말로, 대만을 포함한 4개국 시민들이 연대하여 반전평화 행동을 일으켜야 한다.
일본에서는, 최근 20∼30년간 대중, 대한 의식은 호전되었다. 특히 10년 전의 한류 붐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열기를 띄웠으나, 위와 같은 국가주의의 대두로 인해 그러한 붐도 풍전등화와 같다. 시민간의 교류나 문화교류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초월하여 시민간의 정치적 교류와 연대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일본시민들은 이미 3.11이후, 2번에 걸쳐 탈원전세계회의를 비롯하여 여러차례 탈원전 세계통일 행동을 호소하고, 한-중-대-일 4개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세계적인 차원에서 탈원전 국제연대행동을 시도해왔다.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우선은 올해 3.11을 도쿄-서울-베이징-타이베이에서 동시에, 같은 명칭의 집회-데모를 실시하여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면 한다 (실제적으로 베이징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4개국에는 건설-계획중인 것을 포함하여100기를 넘는 핵발전소가 존재하여 동아시아는 세계 유수의 핵발전 밀집지대가 되었다. 또한 이 4개국의 정권은 모두 핵발전 추진 정권이다. 후쿠시마의 교훈에서 볼 때, 이 중의 어느 한 나라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피해가 일개국에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세계가 후쿠시마를 망각하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그리고 일본에서는 각 핵발전소 재가동 허용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인 올해야말로, 3.11을 전세계에 다시 호소해야 하다.
또 하나는, 8.15반전-평화 통일행동이다. 3.11처럼 도쿄-서울-베이징-타이베이에서 동시에 같은 명칭의 집회-데모를 열어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중국 당국도 전쟁에서 일본에 승리한 이날 열리는 반전-평화집회-데모를 방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4개국의 시민들은 각국이 교전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절대로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또한, 탈원전세계회의와 같은 심포지엄, 워크숍 등을 매년 각국이 차례로 열어 깊이 논의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성숙한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공통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교육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동아시아 각국에서 그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나, 시민 수준에서라면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공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논의와 토론을 통해 깊이 인식하고, 국가간 대립을 초월한 시민사관(市民史觀)을 육성하고 공유해야 한다.
대립하는 국가 사이의 시민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우호관계를 깊이 하여 일어서는 일이야 말로 국가 권력자들을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간의 불모하고 허망스러운 대립은 국가 권력자들과 시민의 국경을 넘은 대립으로 전화할 것이다.

しなり君、無知は恥ずべきこと、君の行為は許されない [Korea]

しなり君、君へのインタビュー記事読みました。
君は自らを「無学で無教養。歴史や政治に対してはあまり関心がないし、熱心に勉強したこともないノンポリ」と語っているが、そのことに僕はまず驚きを覚えました。僕は旭日旗を振った犯人をネトウヨとか在特会につらなる右翼思想の持ち主かと推測していましたが、君はそれを否定し、自らの行動について「政治的な解釈を勝手にされてしまうことは、とても不本意」と述べている。しかし、君のとった行為自体が政治的行動であることを、まず君は認識しなければならない。
君は韓国人の旭日旗に対するアレルギーについては、不勉強であるがゆえに「戦争を知らない若い世代には、薄くな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思いしかなかった」と語りつつ、「旭日旗を振ることで韓国側が動揺し、結果、日本チームに有利な空気が作れるのではないか」と思ったというが、これは明らかに矛盾した論理だね。君は旭日旗を振れば「韓国側が動揺」することを知っていた。つまり、旭日旗の持つ政治的意味、それに込められた政治的メッセージを知っていたわけだ。ただ単に韓国サポーターを挑発する目的だったら、「바보!(バカ!)」と書いた旗でも振ればよかったわけだから。
君は35歳のいい大人だ。である以上、自らの行動には責任が伴っていることを知っているはずだ。自分のとった行動が政治的意味を持ち、それ故相手(韓国人)を挑発し、傷つけることを認識しつつ、自分を「無学で無教養。歴史や政治に対してはあまり関心がないし、熱心に勉強したこともないノンポリ」と規定することは、責任逃れの自己弁明でしかく、決して許されることではない。
もし君が、どうしてもあのような行動をとりたかったのなら、歴史-特に明治維新後の日韓関係史、植民地史、第2次世界大戦において日本が行ったこと、等々を寝る暇も惜しんで勉強し、あの行動をとった後、ソウルで韓国人記者たちを前に記者会見して、自分の行動の正当性を堂々と主張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それほど君のとった行動は重い意味を持つということだ。
ついでに言えば、君はサポーターの役割を相手チームやサポーターを挑発しダメージを与えることであると認識しているようだが、それはどうだろうか? 僕は昔、プロ野球のファンで、何度も球場に足を運んだことがあるが、ある日、応援するチームの応援団が、相手チームの攻撃の時、ある打者に、「アホ、アホ、アホの○○、アホ、アホ、アホの○○」と大声で叫び始めたのを聞いて、とても嫌な思いをしたことがある。また、被爆者で在日韓国人二世でもある往年の大打者=張本勲氏は、現役時代、心ないファンのヤジを日常的に受けていたそうだ。
僕は中学2年生の時の運動会の徒競走で、初恋の人から「○ちゃん、頑張って~!」という思わぬ声援を受け、めっちゃ嬉しくて、そのせいか2位に入った経験があるけれど、その時、逆に誰かから、「○○、きもいぞ!死んじまえ!」なんていうヤジを受けてたら、本当に死んでしまいたくなったかもしれない。
野球でもサッカーでも何でも、本当のファンとかサポーターというのは、「がんばれ~! がんばれ~!」って、応援するのが本来の姿じゃないのかな。相手を挑発したり、悪口言ったりするのは、フェアじゃないし、応援とはいえないと思うよ。
もし僕が君の立場だったら、えげつない韓国サポーターに対して、次のような横断幕を掲げたり、旗を振ったりすると思うよ。
「우리는 한국을 사랑해요! 하지만 이 시합은 일본이 이길 거에요[黒ハート](私たちは韓国が好きです!でもこの試合は日本が勝つ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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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韓流デモに想う-文化は高いところから低い所へ流れる [Korea]

私は1990年から93年にかけて3年間、韓国に住んだ経験がある。当時の韓国は、まだ日本文化が解禁されておらず、街には日本の歌手の不法コピーカセットテープがあふれ、高層アパート街に行くと、あちこちのベランダから大型のパラボラアンテナが突き出て日本のBSテレビが視聴されていた。また、当時日本でヒットしたテレビドラマ「東京ラブストーリー」のパクリドラマ(「嫉妬」)が放送され高視聴率を稼いでいた。
その後、金大中政権は日本文化を公式開放したが、当時韓国では、日本文化が開放されたら日本の低俗な映画ドラマが洪水のように韓国に流入して“文化侵略”を受け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危惧の声が聞かれた。それに対して、私は韓国の友人にこう言った。――韓国の大衆文化のレベルは決して日本に引けをとるものではない。事実、ずいぶん前から日本で韓国映画が数多く紹介されてきたし、テレビドラマでも、ぜひ日本のテレビで放送してほしいようないい作品を私は知っている。文化開放すれば、「日韓の民間レベルの文化交流の発展」といった高尚な話以前に、お互いのいい作品が相互に行き来し、日本にもこれまで以上に韓国の多くの大衆文化が入ってくるだろう。日本の一方的な“文化侵略”など恐れる必要はない。
それから数年して、「冬ソナ」を皮切りに、日本で空前の韓流ブームがわき起こり、ブームが終息しても韓国文化は消えることなく、日本に様々な形で根付くことになった。それはひとつに、資本主義的な意味での資源に乏しい韓国で、金大中政権以来、文化・観光資源を積極的に開発していくことが国家プロジェクトとして強力に推進されたことも大きく与っている。(日本政府も韓国に10年遅れて文化・観光産業の重要性に気づき力を入れ始めたが、まだまだ不十分だ。)
今や韓流は日本のみならず、アジアをはじめ世界中を席巻している。韓国映画やドラマのリメークは、日本だけでなくハリウッドでも行われているが、20年前の韓国における下手な日本のパクリを知っている者としては、まさに隔世の感がある。
文化は澄んだ水のごとく、高いところから低いところへ流れる。韓国のものに限らず、優れた作品、おもしろい作品は、国際化が進展した現代において、必ずその国の殻を破って世界中へ羽ばたいていく。日本の大衆文化でも、アニメ、マンガをはじめ、映画など、現在でも世界で高く評価されている。
もっと身も蓋もない話をすれば、資本主義社会においては、ビジネスとして成り立つ、つまり金になるものは、どこの国のものであろうと商品として流通し消費されるということだ。
今回の「フジテレビは韓流ドラマばかり流してけしからん! 反日的だ」というデモは、右翼的言論を自他共に認めるフジサンケイグループの一翼に対するものであるだけに、笑えてくる。デモをする彼らの排外主義的論理に従えば、ディズニーランドに対しても反米デモを仕掛けるべきだということになろう。
このデモの真相は、3.11以降のこの国の鬱屈とした雰囲気の中で、脱原発を叫んでデモをする人々へは「左翼アレルギー」から素直に同調できない右翼的な人々が、たまたま一芸能人の「嫌韓的」なつぶやきに飛びついた、というだけのことだろう。しかし、今のような社会そして政治状況では、こうした動きが屈折した国民感情に火をつけて、極右の台頭を招く素地を提供する可能性も否定しきれないだけに、警戒する必要がある。
ヨーロッパ諸国のような極右の台頭を招かないためにも、わたしたち脱原発市民は、国民の脱原発という圧倒的世論を背景に、国民の希望にこたえることができるようなたたかいを進め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

韓国映画「ベストセラー」とドラマ「美しい隣人」の音楽がソックリ?ビックリ! [Korea]

TAUTAYAで韓国映画の準新作「ベストセラー(原題:베스트셀러)」というサスペンスものを借りてきて観た。なかなか見応えがあって面白かったのだが、最初にテーマ音楽を聞いて、「あれ? どこかで聞いた音楽?」と思った。しかし、サスペンスものにはありがちな、観る者の不安を誘ういかにもそれらしい曲調だなと、半ば聞き流していたのだが、繰り返し聞くうちに閃いた! そうだ、今年1月~3月にフジテレビ系でやっていた仲間由紀恵・檀れい主演の「美しい隣人」だ。
後でネットで「美しい隣人」のテーマ音楽を調べて聞き比べてみたが、通奏低音的な弦楽器パーツなどそっくりだし、とにかく曲想は驚くほど似ている。映画は昨年4月に韓国で公開され日本では12月に公開されたので、「美しい隣人」の方が後。(ちなみに、音楽担当はそれぞれ韓国人、日本人の別人)以前、韓国映画「最後のプレゼントとテレビドラマ「白い春」の酷似性についてこのブログで紹介したことがあるが、またしても……という感じ。
皮肉にも、「ベストセラー」は、ある女性ベストセラー作家が盗作嫌疑をかけられて……という内容[ふらふら]
百聞は一見にしかず。暇な人は両者を聞き比べてみれば[耳]

韓国映画「最後のプレゼント」とテレビドラマ「白い春」の酷似性 [Korea]

たまたまツタヤで見つけた2008年韓国公開の映画「最後のプレゼント(마지막선물)」(キム・ヨンジュン監督)のDVDを見たら、ストーリー展開そのものには異同があるものの、諸設定が昨春フジテレビ系列で放送された阿部寛主演のドラマ「白い春」とあまりに酷似していたので、以下詳述する。
類似点
・主人公が愛する恋人との幸せな生活を選ぶため、所属しているヤクザ組織から足を洗いたいと申し出たところ、殺人を条件にされる。
・そして、殺人の報酬として金をもらう約束をするが、実際にはその金が恋人の手に渡らなかった。
・殺人を犯した主人公は逮捕され重罪に処せられる。
・恋人は主人公の子どもを身ごもっており、主人公が収監後出産する。
・主人公の恋人に思いを寄せる別の男が、主人公の収監後恋人に近づくが、出産後恋人は他界する。
・その後、その男が実の娘としてその子を育てる。
・主人公はそれと知らずに小学生になった実の娘に出会うことになる。
・実の父と育ての父との心理的葛藤が描かれる。
・娘は主人公を実の父と知ることになる。
・実の父と育ての父が和解する。
・父(韓国映画では両方の父、「白い春」では最初は実の父のはずだったが、実際は育ての父)と娘が海に行く。
・主人公は昔の因縁から殺されることになる。
・死んだ主人公は恋人の墓の近くに眠ることになる。
相違点
・韓国映画では娘は重い肝臓病で生体肝移植を待っている。そして主人公は、娘への「最後のプレゼント」として自身の肝臓を残す。しかし、「白い春」でも終盤に大橋のぞみ扮する娘が病気で入院・手術する。手術費の工面で苦労するのも同じ。
・韓国映画では実の父と育ての父は高校時代の親友だった。「白い春」では赤の他人。
・「白い春」では、主人公の恋人が重い病気で、それを助けるために主人公は金と引き替えに殺人を犯すのだが、韓国映画ではそうした設定はない。
よくありそうな話ではあるが、あまりに類似点が多すぎるし、相違点もディテールで違っているだけで、実は似ている点も少なくない。
二昔前までは、韓国のテレビ・映画が臆面もなく日本映画やドラマをパクリまくっていた。時代は変わった。

菅談話に対する日韓の微妙で絶望的な落差 [Korea]

20日の“日韓併合”100年を前に菅首相が発表した談話は、日韓両国で様々な議論を呼んでいる。日本では進歩的な人々をはじめ多くの国民から歓迎されている反面、嫌韓右翼をはじめとした右派勢力からは当然のごとく批判を浴びている。一方の韓国では、左派(右派ではない)・民族主義勢力は批判、マスコミの論調もどちらかというと否定的なものが多い
韓国での批判の論点は、管談話が1965年の日韓条約で賠償問題等が解決済みとする従来の政府見解を踏襲し、「韓国の人々は、その意に反して行われた植民地支配によって、国と文化を奪われ、民族の誇りを深く傷付けられた」との認識を表明しつつも、1904年の第1次日韓協約には全く触れられていないことから、1905年に日本が島根県への編入を閣議決定した竹島= “独島” 問題にまで言及しているものもある。
韓国人の国民性のひとつは、“自尊心(チャジョンシム)”を重視する点である。彼らのいう自尊心とは、日本人のいう自尊心=プライドとは少しニュアンスが違い、どちらかというと“体面”に近い概念だ。日本の36年に及ぶ植民地支配は、そうした韓民族の自尊心をずたずたに引き裂いてしまい、大きな民族的トラウマとなっていまだに引きずられている。だから、“歴史問題”に触れられると、彼らは過剰反応を示し、自己正当化の論理を全面展開して自尊心の回復を図ろうとする。
また、韓国人は議論好きの教条主義者でもある。それは、実学とは反対の観念論である儒教思想=朱子学に根ざすものであり、韓国の日刊新聞を読んでいると、日本共産党の機関紙=赤旗でも読んでいるかと錯覚することがよくあるほどだ。だから、彼らは管談話ひとつとっても、白か黒かをつけたがり、黒と決めたら全面展開してその非をあげつらわずには気がすまない。
日本が経済的に絶対的優位性を保っていた20世紀後半までならいざ知らず、落日の今の日本に対して、韓国人はもうとっくにそんなトラウマから立ち直って、もっと自信をもって日本に対せばいいのにと、私はかねがね思っているのだが、マスコミの論調は十年一日どころか百年一日の感がある。これでは日韓関係はもとより、韓国人自身にとって何の利益にもならないと思うのだが……。
もちろん未解決の歴史問題を解明していく作業は大切だし、日韓両国の歴史学者が共同して議論して両国の溝を埋めていく作業も必要だと思う。しかし、菅談話が意図した“未来指向”の日韓関係構築に対して、韓国政府はともかく、マスコミの論調は全く逆向きであるといわざるをえない。
もちろん、韓国人が日常生活レベルで常に議論好きで政治談義にばかり口角泡を飛ば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民間レベルの文化交流は、金大中政権以来の十年余りの間だけでも飛躍的に発展してきた。日韓関係の未来は、むしろそちらの方向にこそあると信じ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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